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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석 선생님<정신과 의사가 진단을 내린다는 것> 일상

<정신과 의사가 진단을 내린다는 것>

“우리 아이가 틱장애가 맞나요?”
“아이가 ADHD인지 아닌지 알고 싶어서요.”

병원을 찾은 부모들이 자주 하는 말이다. 부모들은 아이가 어떤 병을 갖고 있는지 궁금해 하며 대부분 그 병이 없다는 말을 내게서 듣고 싶어 한다. 우리 아이가 비록 이런 저런 증상을 갖고 있고, 그로 인해 힘들어 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병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려 한다. 그 순간 나의 역할은 판정관이다. 당신의 아이는 정상입니다. 아니, 당신의 아이는 환자입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도 나의 역할은 판정관이 아니다. 나는 의사이고, 아픈 사람을 돕는 것이 내 역할이다. 아프다는 말은 병명 그 이상이다. 병명은 내 앞에 온 한 사람의 아픔을 설명하기 위해 붙여 놓은 허술한 수단이다. 그의 아픔은 병명으로 모두 설명할 수 없다. 같은 병명을 붙일 수 있는 사람을 모아 둔다고 해도 그들의 아픔은 모두 다르다. 우울증을 앓는 천 명의 사람은 천 가지의 다른 우울을 보여주고, 원래부터 천 명의 다른 사람이었다.

어떤 아이에게 ADHD라는 진단명을 붙인다고 해도 그 아이가 곧 ADHD는 아니다. 아이에겐 진단명으로 설명할 수 없는 엄청나게 많은 면이 있다. 예를 들어 인지능력이 우수한 ADHD(를 가진) 아동도 있고, 부족한 ADHD 아동도 있다. 사교적이고 붙임성이 좋은 ADHD 아동도, 다른 사람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는 ADHD 아동도 있다. 공격적이거나 분노가 높은 ADHD 아동이 있는 반면 순둥이거나 자기주장을 못하는 ADHD 아동도 있다. 이 아이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어려움이 있어 이에 대해 ADHD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아이들은 모두 다르다. 과거도 다르고, 현재도 다르고, 미래도 다를 수밖에 없다.

진단은 영어로 diagnosis다. ‘dia-’는 어원 상 ‘철저하게’, ‘깊게’라는 뜻이고, ‘gnosis’는 ‘인식하다’, ‘이해하다’라는 의미다. 결국 진단은 깊게 이해하는 과정이다. 진단명을 붙이는 것이 진단의 전부가 아니다. 사람을 깊게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굳이 진단명을 붙일 필요는 없다. 한 인간의 고통에 대해 내가 이해한 바를 더 길게 서술할 수도 있다. 정신과에서 수련을 받을 때 우리는 되도록 그렇게 하도록 배웠다. 살아있는 한 사람을 메마른 진단명 속에 우겨 넣고 이해한다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환자’든 진단명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보다 수십 배, 아니 수백 배 많은 것을 갖고 있다.

게다가 진단은 치료 과정에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정신과 영역에서는 특히 그런 경우가 많다. 아직까지 정신과적 진단은 질병의 원인에 대한 확고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기보다 환자가 갖고 있는 증상에 근거하고 있다. 즉, 두뇌의 특정 부위의 세포나, 세포 간 연결에 특정한 이상이 있음을 확인해 진단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증상을 일정 기간 이상, 일정 정도 이상으로 보인다면 (그리고 몇 가지 알려진 이유가 원인이 아님이 확인된다면) 진단한다. 소위 ‘현상학적 진단’이다. 그렇다 보니 초기에 진단한 내용이 치료 과정을 통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환자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기 때문이다. 우울증으로 진단한 사람을 치료하다 보니 조울증임을 알게 되기도 하고, 조울증이라고 진단했는데 밑바탕에 깔린 경계선 인격장애를 발견하기도 한다. 진단이 달라진다고 오진이 아니다. 더 깊게 이해하다 보면 다른 진단에 도달하게 될 수 있다.  

진단이란 아픔을 가진 한 사람을 이해하는 긴 과정이지만 치료를 시작할 때 우리는 진단명을 붙이지 않을 수 없다. 진단명을 붙여야 건강보험공단에 진료비를 청구할 수 있고 초기 치료 계획을 설정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의사들이 그 진단명에 갇힌 채 환자를 바라보지는 않는다. 환자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 자신의 진단이 달라질 수 있음을 알고 있고, 진단명이란 단순한 틀 바깥에 존재하는 한 사람 전체를 이해하려 생각한다.

타인과의 상호작용에 전혀 관심이 없고 자기 세계에 빠져 있는 아이. 보통의 부모가 다른 부모들이 하듯 아이를 돌봐주었음에도 상호작용이 안 되고 언어 발달도 지연되는 아이를 만나면 우리는 자폐장애라는 진단을 내린다. 하지만 그 아이가 앞으로 자폐장애로 최종 진단이 될지 확신하지 않는다. 지금 당장은 유아기 자폐장애에 맞춰서 치료를 진행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할 뿐, 치료 과정에서 아이가 보이는 반응에 따라 얼마든지 진단명을 바꿀 수 있다.

부모들은 내게 와서 아이가 질병이 없다고 듣기를 바란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러나 내 앞에 온 아이가 몇 년 째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그런데도 질병이 없다면 그 아이의 고통에는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할까? 어떤 이유를 대야 할까? 그냥 질병이 없다는 말을 듣고 안심하고 집에 돌아가면 문제가 해결될까? 잠시의 기쁨은 있겠지만 결국 아이는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앞으로도 고통을 겪어야 하지 않겠는가?

진단명은 우리가 고통과, 아픔과, 어려움과 싸우기 위해 붙인 이름일 뿐이다. 그게 뭐 대단한 것이 아니다. 인간이 겪는 고통을 이해하고 돕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 놓은 틀이다. 진단명을 붙이지 않는다고 행복해질 수는 없다. 오히려 막막한 상황에 던져질 뿐이다. 우리 인류가 지금까지 연구하고, 알아온 범위를 벗어난 고통인 셈이고, 아직 도와줄 방법을 갖고 있지 못한 고통인 셈이다. 의사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면 고통은 아픈 사람이 혼자 감당해야 한다.

나는 오늘도 아픈 사람을 만나고, 그들에게 진단을 내린다. 하지만 진단은 특권이 아니다. 사람에게 낙인을 찍거나 꼬리표를 붙이는 행위가 아니다. 그들이 정상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저 그들의 고통을 돕기 위해 하는 행위다. 더 깊게 이해하는 과정일 뿐이다. 만약 도울 필요가 없다면 굳이 진단을 내릴 이유는 없다. 인간은 진단명으로 한정할 수 없는 존재다. 다만 내게 도움을 요청하였기에, 그를 더 깊게 이해하려 노력해보았기에, 그 노력의 결과를 일차적으로 정리한 것이 진단이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진단을 받을 필요가 있다. 진단 과정을 통해 스스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다. 하지만 기억해야 한다. 의사는 판정관이 아니고 진단명은 당신이 아니다. 언제나 당신은 진단명 그 이상의 존재고 의사는 그런 당신을 돕는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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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더.

정신과 의사도 진료실 밖에서 사람을 만난다. 사람들은 농담한다. 당신을 만나면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진단할까봐 겁이 난다고. 하지만 정신과 의사가 사람을 만난다고 상대를 진단하지 않는다. 진단할 권리도 없고 실은 진단할 능력도 없다. 다른 누구와 마찬가지로 정신과 의사도 자기 앞의 사람을 그저 인간으로 대하고, 인간으로 이해할 뿐이다. 진단은 고통을 당하는 사람을 돕기 위해 그를 이해하는 과정이다. 이해란 쉽지 않다. 신중해야 하고, 기술적인 만남이 필요하고, 지식을 바탕으로 한 관찰이 필요하다. 때로는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

정신과적 진단을 판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상 또는 비정상으로 판정하는 과정이라고 오해하기도 한다. 그렇지 않다. 정신과적 진단이 판정이 되어 버리면 사람들은 정신과 의사에게 자신의 진실을 보이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들을 깊게 이해할 수 없고 결국 도울 수도 없다. 진단은 스스로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실패한다. 보상 등을 목적으로 장애 진단을 받으러 온 사람들의 경우가 그 예다. 그들은 자주 자신의 상태를 속이기에 우리는 그들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는데 실패하곤 한다. 알더라도 피상적으로만 파악하고 만다. 장애 진단을 내린 후 나중에 다시 만나면 그때 내가 판정했던 사람과는 다른 사람임을 알게 될 때도 있다.

가끔 나는 부모들에게 이야기한다. 왜 진단을 받으려고 하시냐고? 아이가 어려운 것을 도우려는 목적이 아니라면 굳이 진단을 받지 말라고 한다. 진단의 목적은 도움을 주는데 있다.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면 진단을 받을 필요도 없다. 부모들은 말한다. 아이가 정상임을 확인받고 싶어서라고. 하지만 모든 아이는 정상이다. 그저 조금 다른 정상 상태일 뿐. 아이가 고통을 받고 있다고 해도 정상이다. 우리 모두는 다른 삶을 살아내고 있을 뿐이다.

어디까지가 정상이고 어디서부터는 비정상인지 구별하는 일은 생각보다 힘들다. 그리고 무의미하다. 정상이어도 우리는 힘들고, 때론 도움이 필요하다. 적잖은 사람들이 자신의 오래된 한계 때문에 괴로워한다. 새롭게 생긴 어려움을 평생을 갖고 살아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모두 정상이다. 어떤 사람은 도움이 많이 필요하고, 어떤 사람은 도움이 필요 없지만 그 모두가 정상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 비정상이기도 하다.

역사를 통해 우리는 배웠다. 사람에게 비정상이라 딱지를 붙이는 일은 위험하다는 것을. 그것은 도우려는 목적의 행위가 아니다. 배제와 차별을 만들기 쉽다. 그러니 걱정 마시길. 정신과 의사는 동료 시민을 진단하지 않는다. 다만 당신이 내 앞에 고통 받는 한 사람으로 와서 도움을 요청할 때, 도우려는 목적으로 진단할 뿐이다. 이해하려 들 뿐이다. 그게 진단의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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